
레퍼런스 요구는 품질 검증이 아니라 담당자 책임 회피 장치다
"좋네요. 그런데 다른 데는 어디 납품하셨어요?"
창업가는 여기서 말문이 막힌다. 없으니까. 그리고 다음 달에도 같은 질문을 듣는다. 레퍼런스가 없어서 못 팔고, 못 팔아서 레퍼런스가 안 생긴다. 경력이 없어 취업 못하는 신입 같다. 이 고리를 못 끊고 1년을 보내는 창업가가 많다. 문제는 대응 방식이다. 대부분 제품 설명을 더 길게 만드는 오류를 범한다. 기능을 추가하고 제안서를 30장으로 늘리고 인증을 하나 더 딴다. 전부 헛다리다. 상대가 레퍼런스를 묻는 진짜 이유는 제품 성능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구매 담당자는 회사 돈을 쓰지만 책임은 자기 이름으로 진다. 신생 업체를 골랐다가 일이 틀어지면 상사에게 불려 가는 사람은 담당자 본인이다. 검증된 업체를 고르면 실패해도 "업계 1위를 썼다"라는 방패가 남는다. 레퍼런스 요구는 품질 검증 장치가 아니라 책임 회피 장치다. 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제품을 들고 가도 계속 밀린다. 팔아야 할 대상이 회사가 아니라 담당자 개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두 갈래 길을 준비하면 된다.
첫째, 담당자가 지는 위험 자체를 줄인다. 계약을 작게 쪼갠다. 3천만 원짜리 연간 계약 대신 300만 원짜리 1차 테스트 구매를 제안한다. 금액이 팀장 전결 구간으로 내려가면 담당자는 임원 결재를 거치지 않는다. 여기에 조항을 하나 붙인다. 1차 산출물을 보고 판단한 후 거래를 중지할 수 있다고 계약서에 명시한다. 담당자에게 퇴로를 만들어 주는 셈이다. 퇴로가 있으면 사람은 훨씬 쉽게 결정한다.
둘째, 레퍼런스를 아예 묻지 않는 시장을 먼저 뚫는다. 공공이다. 조달청이 운영하는 벤처나라는 벤처기업이나 사업 개시 7년 이내 창업기업이 대상이다. 다수공급자계약이나 우수조달물품처럼 까다로운 요건을 못 맞추는 기업이 공공기관에 직접 납품하도록 만든 전용관이다. 혁신제품으로 지정받으면 3년간 공공기관과 수의계약을 맺을 자격이 생기고 조달청 예산으로 기관에 공급하는 시범구매 대상이 된다. 중소기업제품 공공구매종합정보망이 운영하는 기술개발제품 시범구매는 창업기업과 공공조달 첫걸음기업을 명시적으로 대상에 올렸고, 2026년 1월 기준 참여기관이 562개다. 주목할 장치는 구매면책이다. 정부는 담당자가 신생 업체를 골랐다가 지는 책임을 제도로 덜어 줬다. 민간 담당자에게도 같은 안전장치를 설계해야 한다는 증거다.

공공기관 담당자에게는 살 이유까지 붙어 있다. 공기업과 준정부기관 경영평가, 지자체 합동평가에 시범구매 제품 구매 실적이 지표로 들어간다. 사는 쪽 성과표에 점수가 달리는 구조다. 지금 이 접근이 더 중요해진 이유도 있다. 콜드메일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AI가 개인화 문구를 대량으로 찍어 내면서 "귀사 홈페이지를 인상 깊게 봤습니다"로 시작하는 메일이 하루에도 수십 통씩 담당자 메일함에 쌓인다. 정성껏 쓴 메일과 자동 발송 메일을 받는 쪽이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전부 지운다. 역설적으로 손이 많이 가는 방식이 다시 강해졌다. 상대 회사 자료로 실제 결과물 한 장을 만들어 들고 가면, 그 한 장이 제안서 서른 장보다 관심을 받는다. 무상 파일럿도 조심해야 한다. 공짜 성과는 윗선에 보고하지 않는다. 예산을 쓰지 않았으니 보고할 사안이 아니다. 금액이 작아도 돈을 받아야 사내 문서에 남고 그 문서가 다음 계약 근거가 된다. 레퍼런스는 만족도가 아니라 회계 기록에서 나온다.
당장 할 일은 이렇다. 먼저 목표 기업 20개를 적고 각 회사에서 이 문제로 실제 곤란을 겪는 부서와 직급을 특정한다. 대표이사가 아니라 실무 팀장이다. 다음으로 그중 다섯 곳을 골라서 공개 자료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결과물 한 장씩을 미리 만든다. 제안서가 아니라 완성된 샘플이다. 메일에는 설명을 붙이지 말고 그 한 장을 먼저 보낸다. 회신이 오면 계약 대신 소액 진단부터 제안하고 중단 조항을 먼저 알린다. 동시에 벤처나라 지정 신청 자격을 확인한다. 창업 7년 이내라면 지금이 기회다. 마지막으로 첫 건이 끝나면 담당자 이름과 직함을 넣은 후기를 요청한다. 회사 이름만 적힌 납품 실적보다 사람 이름이 붙은 문장이 다음 미팅을 훨씬 빨리 끝낸다.
'블로그 > 오늘 한 꼭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첫 고객 열 명은 광고로 못 산다 (0) | 2026.09.13 |
|---|---|
| 원가에 마진 붙이는 순간, 가격은 무너진다 (1) | 2026.09.01 |
| AI 페르소나, 고객이 아니라 가설이다 (0) | 2026.08.28 |
| 아이디어 검증, AI에게 시키면 안 되는 일 (0) | 2026.08.23 |
| 모두의 창업 2차, 지원할까 말까 (0) | 2026.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