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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오늘 한 꼭지

아이디어 검증, AI에게 시키면 안 되는 일

스타트업 43%가 시장을 못 찾고 죽는다. 검증 순서를 먼저 세운 다음 AI를 붙여야 한다.

CB인사이트가 2026년 3월에 공개한 보고서는 2023년 이후 문 닫은 벤처 투자 기업 431곳을 분석했다. 폐업 원인 1위는 자금 소진, 70%다. 하지만, 진짜 원인은 그 아래에 깔려 있다. 제품과 시장이 맞지 않아 무너진 기업이 43%, 타이밍을 잘못 잡은 기업이 29%, 단위 경제가 성립하지 않은 기업이 19%다. 창업가는 돈이 떨어져서 죽지 않는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물건을 만드느라 돈을 다 쓴 다음에 죽는다. 국내 사정도 다르지 않다. 국가데이터처 기업생멸행정통계를 보면 2018년에 태어난 기업 가운데 5년을 넘긴 곳은 36.4%뿐이다. 셋 중 둘이 사라진다. 정부 지원사업에 뽑혔다고 안심할 일도 아니다. 심사에 통과한 사업계획서는 시장이 아니라 심사위원을 설득한 문서다. 무서운 대목은 따로 있다. "시장이 없다"는 사실은 출시한 뒤에 발견하는 정보가 아니다. 코드 한 줄 쓰기 전에 확인할 수 있는 정보다.

검증에는 순서가 있다. 순서를 건너뛰면 답을 믿을 수 없다.

첫째, 문제 검증이다. "이런 서비스 있으면 쓰시겠어요?"라고 묻는 순간 검증이 아니라 칭찬 요청이 된다.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십니까", "이 문제 때문에 마지막으로 돈이나 시간을 쓴 적이 언제입니까"로 물어야 한다. 미래 의향 대신 과거 행동을 캐야 한다.
둘째, 고객 검증이다. 쓰는 사람과 돈 내는 사람을 갈라서 확인해야 한다. 학부모가 결제하고 학생이 쓰는 서비스라면, 인터뷰 절반은 학부모 몫이다.
셋째, 해결책 검증이다. 제품을 만들지 말고 약속을 팔아야 한다. 랜딩페이지 한 장, 사전 주문 버튼, 사람이 손으로 처리하는 수기 서비스면 충분하다.
넷째, 지불 검증이다. 가격을 입 밖에 꺼내야 한다. 지갑을 여는 지점까지 가야 검증이 끝난다. 기준도 숫자로 잡자. 목표 고객 20~30명을 만나고, 그 가운데 사전 결제나 계약금까지 간 사람 수만 성과로 센다. "관심 있다"는 응답은 0으로 계산한다.

CB인사이트 자료에서 제품·시장 적합성 실패 기업 셋 중 둘은 끝내 시장을 찾지 못한 초기 기업이었다. 그런데 시리즈B 이상 20곳도 같은 이유로 무너졌다. 로봇 피자에서 친환경 포장재로 방향을 튼 줌(Zume)은 4억 4600만 달러를 태우고 문을 닫았다. 초기 반응을 시장 크기로 착각하면, 규모가 커져도 결말은 같다.

지금 창업가 손에 AI가 들어왔다. 검증 비용이 내려간 만큼 착각 비용도 같이 올라갔다. 시제품 제작 단가가 떨어지자 "일단 만들면서 검증하겠다"는 말이 흔해졌다. 위험한 문장이다. 만드는 속도가 빨라지면 틀린 물건을 만드는 속도도 똑같이 빨라진다. AI에게 "이 아이디어 어떤가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훌륭하다고 답한다. 여러 평가에서 주요 모델이 사용자 의견에 동조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합성 페르소나 연구 결과는 더 날카롭다. 컬럼비아 비즈니스스쿨 연구진이 2024년 미국 대선을 소재로 시험한 결과, 인구통계 수준 페르소나는 그럭저럭 맞췄지만 배경 서사까지 정교하게 붙인 페르소나는 전 주에서 민주당 승리를 예측하며 크게 빗나갔다. 페르소나를 사람답게 꾸밀수록 정확도가 떨어졌다. 반대 사례도 있다. 실제 인터뷰 기록을 먹인 '디지털 트윈'은 빠진 응답을 거의 정확하게 메웠다. 결론은 하나다. AI는 실제 사람에게서 받아 온 재료를 다룰 때 강하고, 사람을 대신할 때 약하다. 가짜 고객 100명은 진짜 고객 5명을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이번 주 순서는 이렇다. 먼저 만나야 할 목표 고객 20명 명단을 실명으로 적는다. 명단을 못 채운다면 아이디어가 아니라 고객 정의부터 틀렸다는 신호다. AI에게 인터뷰 질문을 대신 짜게 하지 말고, 내가 쓴 질문지를 넘겨 유도 질문과 미래 가정 질문을 골라내게 한다. 인터뷰는 사람이 직접 한다. 대신 녹취를 AI에게 맡겨 고객이 반복한 단어, 말끝을 흐린 지점, 지금 쓰는 대안 이름을 뽑는다. 경쟁 대안 지도는 AI로 30분이면 만든다. 다만 그 목록 가운데 세 개는 직접 결제해서 써 봐야 한다. 그다음 랜딩페이지 문구 다섯 종을 AI로 만들고 광고비 10만 원을 태운다. 이때 세는 숫자는 클릭이 아니라 사전 결제와 대기 명단 등록 건수다. 마지막으로 AI에게 내 아이디어를 무너뜨려 달라고 요청한다. 반박 목록에서 데이터로 막지 못하는 항목이 남는다면, 그 항목이 다음 주 검증 과제다. 검증은 아이디어를 지키는 작업이 아니다. 빨리 죽일 수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