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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오늘 한 꼭지

아이디어보다 문제 정의가 먼저다

아이디어부터 쏟아내는 대표를 자주 만난다. 물론 나도 그랬다. "반려동물 SNS를 만들려고요", "중고 거래 앱에 채팅 기능을 넣으려고요" 같은 말이다. 그런데 "그 서비스가 왜 필요한가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동문서답이다. 현상과 문제를 구분하지 못한 상태다. 현상은 눈에 보이는 상황이고 문제는 그 상황 뒤에 숨은 진짜 고객이 느끼는 불편이다.

실제로 반려동물 케어 시장에서 한 팀은 '반려동물 호텔이 부족하다'라는 현상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깊이 파고들자 진짜 문제는 달랐다. 고객은 좁은 공간에 반려동물을 가두는 방식 자체를 불편해했다. 호텔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고객이 원하는 시설이 없던 것이다. 이 재정의 덕분에 펫시터와 보호자를 연결하는 서비스 모델이 나왔고 미국 도그메이트(Dogmate)가 이 방식으로 시장을 열었다. 현상에서 멈추면 호텔을 하나 더 짓는 데서 사고가 끝난다. 문제를 발견하면 완전히 다른 사업이 태어난다.

그렇다면 현상에서 문제를 어떻게 유추할까. 검증된 경로는 세 단계다. 첫째, 현상을 사실 그대로 기록한다. '어르신들이 약을 제때 안 드신다'처럼 해석을 섞지 않은 관찰 문장으로 적는다. 둘째, '왜'를 반복해서 묻는다. 왜 약을 안 드실까 → 복용 시간을 잊기 때문이다 → 왜 잊을까 → 하루에 먹는 약 종류가 일곱 가지라 관리 자체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섯 번쯤 파고들면 표면의 현상이 '복잡한 복약 정보를 관리할 방법이 없다'는 문제로 좁혀진다. 셋째, 유추한 문제를 가설 형태로 적고 고객에게 검증한다. 이 단계가 핵심이다.

콘텐츠 플랫폼 퍼블리는 콘텐츠 반응이 기대와 다를 때 팀원들 추측으로 결론 내리지 않았다. 가설을 세우고 고객 인터뷰로 확인했다. 그 결과 '헬스케어 브랜드엔 관심 없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명상 같은 멘탈케어엔 관심 많다'는 의외의 답을 얻었다. 내가 하는 유추는 어디까지나 가설이다. 고객 입에서 확인해야 비로소 문제가 된다.

이 원칙이 지금 더 중요해진 이유가 있다. 정부 지원 사업이든 투자 유치든 심사 기준이 '얼마나 참신한 아이디어인가'에서 '얼마나 명확한 문제를 풀고 있는가'로 옮겨 가는 중이다. AI 툴 하나면 누구나 그럴듯한 서비스 기획안을 뽑아내는 시대라 아이디어 자체는 이미 값이 떨어졌다. 벤처 투자 업계에서도 '스타트업 아이디어는 생각해서 얻는 게 아니라 문제를 발견해서 얻는 것'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겉보기엔 그럴듯해도 아무도 절박하게 원하지 않는 아이디어를 '시트콤 스타트업 아이디어'라고 부르며 경계하는 이유다. 퓨처플레이 류중희 대표는 남들이 잘 모르는 문제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투자자의 공감을 얻는다고 말한다. 문제 발굴 능력 자체가 창업가의 경쟁력이라는 뜻이다.

오늘부터 실행할 방법을 정리한다. 먼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종이 왼쪽에 현상, 오른쪽에 유추한 문제를 나란히 적어 본다. 왼쪽과 오른쪽이 같은 문장이라면 아직 문제를 못 찾은 상태다. 그다음 '왜'를 다섯 번 물어 오른쪽 칸을 다시 채운다. 여기까지는 책상에서 가능하지만, 다음 단계는 반드시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잠재 고객 열 명과 인터뷰를 잡되 "이런 서비스 어때요?"라고 묻지 않는다. 그 질문은 예의상 긍정 답변만 부른다. 대신 "최근에 이 문제 때문에 무엇을 포기했나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기존에 어떤 방법을 썼고 얼마를 지불했나요"처럼 과거의 구체적 행동을 묻는다. 답변에 감정이 실린 단어가 나오면 그 지점을 꼬리 질문으로 다시 파고든다. 예상과 다른 답변이 나왔다면 실망할 일이 아니라 축하할 일이다. 잘못된 아이디어에 자본을 쏟기 전에 방향을 바로잡을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