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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영화와 음악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일단 이 영화. 좋아하는 것이 잔뜩 담겨있는 어린이날 과자 선물 세트 같은 영화다. 하나씩 꺼내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보는 사람까지 행복해지는 앤 해서웨이 특유 미소, 에밀리 블런트가 들려주는 매력적인 억양, 1편에 이어서 여전한 메릴 스트리프가 발산하는 카리스마, 듣는 사람 귀를 간지럽히는 스탠리 투치가 들려주는 신뢰 가득한 목소리까지. 거기에 케네스 브레너 같은 명배우와 함께 신예 헬렌 J. 센까지 배우 모두가 멋진 연기를 보여준다. 그 외에도 모든 컷을 스크랩하고 싶은 현란한 패션, 패션쇼를 방불케 하는 감각적인 음악. 뭐. 까는 게 직업인 사람들이야 뭐든 부족한 부분이 많이 보이겠지만, 당분간 즐겁게 본 영화에서는 나쁜 점을 굳이 찾아내지 않기로 했다.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요소들은 그만 떠들고 영화 스토리에 대해 적어 보자. 

한밭야구장을 철거한다고 할 때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대전 한화생명볼파크라는 새 야구장이 생긴 것이 대전 시민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줬을지 모르겠지만, 1964년부터 다양한 역사를 담은 장소를 없애는 것이 맞느냐는 거다. 한밭야구장이 무너지면 빙그레 이글스가 우승했던 경기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동네 형들과 손을 잡고 처음 프로 야구 경기를 보러 갔던 기억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동대문운동장을 헐어 버리고 DDP가 들어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DDP, 지금은 어떻게 됐나. DDP가 할 수 있는 것과 동대문운동장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비교할 것이 아니다. 우린 100년 한국 스포츠 역사를 '디자인 서울'이라는 얄팍한 핑계로 스스로 헐어버렸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는 이런 이야기와 괘를 함께 한다. 언론사는 경영 악화를 이유로 문자 한 통으로 기자들을 전원 해고한다. 더이상 사람들은 종이 잡지를 읽지 않는다. 이제는 스마트폰에서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면서 손바닥만한 크기 화보를 감상한다. '미란다'가 지휘하는 '런웨이' 역시 이런 시류에 휩쓸린다. 세상은 변했다. 여전히 패션계 리더이자 아이콘이지만 더이상 미란다도 많이 변했다. 이제는 어정쩡한 자세로 자기가 입었던 코트를 직접 걸어야 하는 신세다. "조용한 럭셔리라더니 너무 조용해서 보청기가 필요할 지경" 같은 촌철살인 멘트는 여전하지만, 그 독설도 맘껏 발산하지 못한다. 회의 때 말이라도 좀 강하게 하려면 비서가 옆에서 계속 헛기침을 한다. 

AI는 잡지사는 물론 패션계 전체를 위협하는 지경까지 왔다. 영화 속 빌런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빅테크 사장은 "미래가 폼페이 용암처럼 돌진해 오고 있다"라고 충고한다. "앞으로는 잡지도 모델도 디자이너도 다 필요 없을 것"이라 장담한다. AI로 다 대처 가능할 것이란 이야기다. 여기에 미란다는 "인간이 만드는 예술과 아름다움은 지켜야 한다"라는 말로 대응한다. 하지만, 그 말이 무게감 있게 다가가지 않는다. 미란다도 눈치를 채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다. 내겐 영화 속 가장 슬픈 장면이다. 많은 부분에서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대변한다. 초고가 패션 아이템들을 온몸에 두르고 항상 파티를 즐기는 그 세상도 디지털 기술로 인한 시대 변화에 흔들리고 있다. 세상 어디도 다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적 예술과 아름다움', 즉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새로운 세대가 구시대를 밀어 내면 우리에게 남는 건 무엇일까? 미란다와 재혼한 바이올리스트 스튜어트는 '쌍둥이'와 '자신'이 끝까지 미란다 곁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맞다. 우리는 언제나 가족, 그리고 내가 그려온 역사, 인류 전체가 만들어 놓은 전통과 함께해야 한다. 뭐든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첫사랑과 수줍은 키스를 했던 어두운 뒷골목, 엄마 손을 잡고 처음으로 어묵 한 꼬치를 사 먹었던 재래시장, 좋아하는 선수를 소리치며 응원했던 그 경기장. 내 아이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바뀐 세상에도 여전히 남아 있길 바라본다. 

P.S. 1편에 이어 앤디는 스마트폰 하나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성사한다. 일이 성사될 때까지 거절에 거절을 당하면서도 몇 날 동안 몇 번이고 계속 도전한다. 그리고 결국은 원하는 걸 얻어내는 그 능력 하나는 정말 존경스럽다. 기자는 무릇 그래야 하지만, 그런 걸 제대로 몸에 익히지 못한 현실이 부끄럽다.